개미 베르나르 베르베르 - 103683호가 전하는 다른 시각에서 본 세상과 종족 간 소통의 철학

 

개미 이미지

만약 우리가 보는 세상이 다른 거대한 존재들에게 관찰당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의 '개미(Les Fourmis)'는 이러한 철학적 질문에서 시작된 놀라운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1991년 출간된 이 작품은 베르베르가 8살 때부터 품어온 의문들을 바탕으로 20여 년간의 개미 관찰과 연구, 그리고 120번에 가까운 개작을 거쳐 완성된 역작입니다. 한국에서는 1993년 처음 소개된 이후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전 세계 판매 부수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사랑받았으며, 이는 프랑스 본국에서도 작가의 명성을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추리소설의 긴장감과 과학소설의 정밀함, 그리고 철학적 깊이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드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천재적 상상력과 창작 배경

베르나르 베르베르(1961년 출생)는 일곱 살 때부터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한 타고난 글쟁이입니다. 프랑스 툴루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개미를 유심히 관찰했으며, 8살 때는 벼룩에 관한 글을 작성하기도 했습니다. '별들의 전쟁' 세대에 속하는 그는 고등학교 때 만화와 시나리오에 탐닉하면서 만화 신문 '유포리(Euphorie)'를 발행했고, 이후 올더스 헉슬리와 H.G. 웰스를 사숙하면서 소설과 과학을 익혔습니다.

1979년 툴루즈 제1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을 전공하고 고등 언론 학교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한 후,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 과학 잡지에 개미에 관한 평론을 발표했습니다. 1978년 17살 때 개미에 관한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 그는 12년 동안 컴퓨터와 씨름하면서 무려 120번에 가까운 개작을 거쳐 1991년 '개미'를 완성했습니다. 실제로 집안에 개미집을 들여다 놓고 개미를 기르며 생태를 관찰했을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까지 가서 마냥개미를 연구하다 개미떼의 공격을 받고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베르베르의 '개미'는 출간 당시 프랑스에서는 큰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한국에서의 폭발적인 반응에 힘입어 오히려 본국에서 작가의 명성을 높인 희한한 케이스입니다. 첫 출판 당시 한국에서는 미지의 영역이었기에 저작권 구매에 나서려는 출판사가 없었지만, 표지에 이끌려 한 출판사가 출판을 결정했고, 이는 대성공으로 이어졌습니다.

3부작 구성과 혁신적인 서사 구조

'개미'는 1부 '개미', 2부 '개미의 날', 3부 '개미 혁명'으로 구성된 3부작으로, 각각 다른 관점을 구현하는 세 개의 플롯이 병행되면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첫 번째는 개미들의 관점, 두 번째는 인간들(작중에서는 '손가락들')의 관점, 세 번째는 103683호처럼 두 세계를 모두 경험한 자의 관점입니다. 이러한 다층적 서사 구조는 독자들로 하여금 서로 다른 시각에서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게 하며, 각 종족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깨닫게 만듭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인간 이야기와 개미 이야기가 단순히 병치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에드몽 웰즈가 쓴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은 두 세계를 이어주는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하며,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개미 사회의 놀라운 지혜와 인간 사회의 한계를 동시에 발견하게 됩니다. 베르베르는 1부에서 두 문명의 만남을, 2부에서 대결을, 3부에서 협력을 다루겠다는 명확한 계획을 가지고 작품을 구상했습니다.

책의 배경은 21세기 초로 설정되어 있으며, 베르베르가 책을 쓴 시기와 비교하면 가까운 미래입니다. 이러한 설정은 작품에 현실성을 부여하면서도 상상력의 자유로움을 보장하는 절묘한 선택이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추리소설의 긴장감과 과학소설의 정밀함이 잘 녹아있어 독자들에게 감각적 재미를 선사하며, 동시에 철학적 성찰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103683호와 56호 - 개미 세계의 영웅들

소설의 개미 파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103683호(후에 103호로 불림)라는 병정개미입니다. 원래는 클리푸니가 암개미 56호였던 시절, 바위 냄새가 나는 개미들의 음모를 조사하기 위해 끌어들인 지나가던 병정개미에 불과했지만, 작중에서 보여주는 활약은 가히 개미판 소드마스터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는 1부부터 3부까지 한결같이 개미 이야기의 주역 자리를 차지하며, 개미 세계와 인간 세계를 이어주는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합니다.

56호 공주개미(후에 클리푸니 여왕개미)는 결혼 비행을 앞둔 암개미로, 327호가 알려준 '바위 냄새가 나는 개미들'에 대한 진상을 조사하는 일종의 공대장 역할을 합니다. 결혼비행을 성공한 후 클리푸캉이라는 도시를 세워 클리푸니라는 이름의 여왕개미로 즉위하며, 1부 말미에는 벨로캉을 접수하게 됩니다. 2부에서는 바위 냄새가 나는 개미들의 진실을 알게 되고 인간들에 대한 원정대를 파견하기도 합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이 개미들이 종족으로는 개미지만 지성 수준은 인간과 별 차이가 없다는 점입니다. 103683호는 텔레비전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고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는 경지에까지 올랐으며, 심지어 개미 세계에서 마약만큼 중독성을 자랑하는 로메슈제 분비물을 이용하는 지혜까지 보여줍니다. 이들의 모험과 성장 과정은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에드몽 웰즈와 신비로운 지하 세계

인간 파트의 핵심 인물은 이미 작품 시작 시점에서 죽은 인물인 에드몽 웰즈입니다. 박테리아를 전공한 생물학자이며 곤충학자이기도 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만의 은밀한 은신처를 만들고자 하는 집착과 절대적인 지식을 얻고자 하는 강박관념을 가진 신비로운 인물이었습니다. 베르베르는 에드몽의 외모를 소설가 카프카를 닮았다고 설정하여 그의 신비롭고 철학적인 성격을 암시했습니다.

에드몽이 남긴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은 소설 전체의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발단이 됩니다. 이 책은 베르베르가 열네 살 때부터 쓰기 시작한 거대한 잡동사니의 창고이면서 동시에 보물 상자이기도 한 독특한 작품으로, 박물학과 형이상학, 공학과 마술, 수학과 신비 신학, 현대의 서사시와 고대의 의례가 어우러진 형식을 선보입니다. 실제로 베르베르는 이 백과사전을 현실에서도 출간했습니다.

에드몽의 조카 조나탕 웰즈에게 "절대로 지하실을 열지 마라"라고 당부했던 에드몽의 집에는 신비로운 지하 사원이 있으며, 이곳에 갇힌 조나탕과 경찰들의 지하 세계에서의 삶과 연속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지상 인간들의 이야기가 개미들의 모험과 병행하여 전개됩니다. 이러한 구조는 독자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긴장감을 유지하게 하며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로제타석과 두 종족 간의 소통

소설에서 가장 혁신적인 소품 중 하나는 '로제타석'입니다. 에드몽 웰즈가 개발한 이 장치는 페로몬을 내뿜어 개미와 인간 사이의 대화가 가능하게 해주는 놀라운 발명품입니다.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의 열쇠가 된 실제 로제타석에서 이름을 따온 이 장치는 두 종족 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2부에서 103683호가 자크 멜리에스와 레티샤 웰즈를 만나 아서 라미레의 집에서 로제타석을 통해 대화하는 장면은 소설의 백미 중 하나입니다.

이 소통 과정을 통해 103683호는 텔레비전을 시청하며 인간 문명에 대해 아주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특히 포르노 영화에 대한 설명까지 듣게 되는 장면은 베르베르 특유의 유머 감각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개미들은 인간의 문명을 학습하면서 자신들의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발견하게 되며, 이는 후에 개미 혁명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소통은 항상 성공적이지만은 않습니다. 니콜라가 로제타석이 개미들에게 해악이 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이를 부셔버리는 장면은 두 종족 간의 이해와 불신이 교차하는 복잡한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이는 현실에서도 서로 다른 문화나 종족 간의 소통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개미 혁명과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

3부 '개미 혁명'에서는 두 종족 간의 협력과 화해가 주요 테마로 등장합니다. 쥘리는 개미를 위한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개미들'이라는 그룹을 창설하고 새 세상을 위해 고등학교를 점거하는 등 적극적인 행동에 나섭니다. 이는 개미를 모방하여 개미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것을 추구하는 비폭력 혁명으로 묘사됩니다. 반면 개미 103683호는 여왕개미가 되어 인간 문명의 장점을 도입하려는 혁명을 일으키며 인간들과의 협력을 추구합니다.

손가락 혁명을 주도한 일개미는 경찰들에게 발각되어 죽음을 맞이하지만, 이들의 시도는 완전히 헛되지 않았습니다. 혁명 이후 쥘리는 후에 있을 새로운 혁명을 기대하며 백과사전을 원래 자리에 가져다 두었고, 이는 미래에 대한 희망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베르베르는 이를 통해 서로 다른 종족이나 문명이 만남, 대결, 협력이라는 세 단계를 거치면서 발전해 간다는 자신의 철학을 보여줍니다.

3부 마지막에서 103683호는 인간만이 가진 정신 작용이라고 여겨지던 해학을 개미로서 깨닫게 되는데, 이는 종족의 경계를 넘어선 이해와 성장을 상징하는 감동적인 순간입니다. 이후 103683호는 수명이 다해 사망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두 종족 간의 이해와 협력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소중한 선례가 됩니다.

개미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

베르베르는 '개미'를 통해 300만 년밖에 되지 않는 인간의 오만함을 1억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살아남아온 개미들의 눈에 빗대어 경고합니다.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개미들의 사회는 여러 면에서 인간 사회보다 우월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개미들은 힘든 일이 있을 때 다른 개미를 탓하지 않고 오직 문제 해결에만 몰두한다고 합니다. 반면 인간은 남 탓을 하다가 정작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이 작가의 지적입니다.

개미가 오랜 시간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은 이기심 없는 마음과 강한 연대의식 때문이라고 베르베르는 분석합니다. 개미 사회에서는 개체의 이익보다 집단의 이익이 우선시되며, 이러한 철학이 종족의 번영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소설은 개미 사회의 한계도 보여줍니다. 개미들이 자아를 갖는 것을 '마음의 병'이라고 부르며 극히 혐오한다는 설정은 집단주의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103683호가 동료들이 죽는 것을 막기 위해 개미 사회의 순리를 거부하는 장면은 개체성과 집단성의 조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베르베르는 이를 통해 무조건적인 집단주의도, 극단적인 개인주의도 완전한 해답이 될 수 없음을 시사하며, 두 가치의 균형점을 찾는 것이 진정한 지혜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문학적 성취와 현대적 의미

'개미'는 출간 당시부터 현재까지 단순한 SF 소설을 넘어서 철학적 깊이와 사회 비판적 시각을 담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캐서린 밀스는 SF 사이트에서 "이 책은 개미의 문화를 인간의 시각에서 묘사한 장치로, 일상 생활의 친밀한 모습과 결합하여 인간 과학적 관찰의 피상성을 보여준다"고 평가했습니다. 베르베르는 동물의 시선에서 본 인간 세상의 한심함을 그려내면서 인류 평화와 생명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 이 작품이 갖는 의미는 더욱 특별합니다. 환경 파괴, 기후 변화, 생태계 위기 등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상황에서, 개미라는 작은 생명체의 관점에서 인간 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이 작품의 메시지는 더욱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또한 AI와 같은 새로운 지능체의 등장으로 인간의 고유성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는 현재, 서로 다른 종족 간의 이해와 협력을 다룬 이 소설의 주제는 매우 현대적인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베르베르는 이후 '타나토노트', '천사들의 제국', '신' 등의 작품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상상력의 세계를 지속적으로 확장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개미'는 여전히 그의 대표작으로 여겨지며, 톨스토이, 셰익스피어, 헤르만 헤세 등과 함께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 작가 명단에 베르베르의 이름을 올리게 한 결정적인 작품입니다.

'개미'는 단순한 상상력의 산물을 넘어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게 만드는 특별한 작품입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20여 년간의 관찰과 연구, 그리고 천재적 상상력이 만들어낸 이 소설은 과학과 철학, 추리와 모험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문학의 걸작입니다.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 분들, 과학적 상상력과 철학적 깊이를 동시에 추구하는 독자들, 그리고 기존의 사고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고 싶은 모든 분들에게 이 작품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103683호와 56호의 모험이 여러분의 삶에도 새로운 시각과 깊은 통찰을 선사하기를 바랍니다.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안녕이라 그랬어 완벽 가이드 - 김애란 소설의 현대인 소통과 관계 이야기 문학 분석

다크 넛지 로라 도즈워스 알고리즘 심리조작 실체 피해사례 실전대응법 소비자보호 현명한소비자 되기

구의 증명 완벽 분석 - 수학과 추리의 만남으로 탄생한 독창적 스토리텔링과 감동적 교훈